Monday, 13 June 2011
철
그러다 일 주일쯤 지났을까, 문득 돌아보니 벌통들이 보이지 않았다. 벌통들을 싣고 왔음이 분명한 트럭과, 쬐약볕 아래에서 온 몸을 비닐로 무장한 아저씨들도 없었다. 그제서야 문득,
"봄도 한철이지만, 꽃 피는 시기는 더 짧은 철이구나."
싶었다. 봄은 갔고, 꽃 피던 시기는 지난지 더 오래 되었다. 그 뒤로도 가끔 그 길엔 집을 찾지 못한 작은 벌들이 아주 천천히 날아 다녔다. 그리고 여전히, 인도 위로는 벌의 시체자국이 선명하다. 그 자리에 꽃이, 벌이, 벌집이 있었다는 건,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건, 인간사로 치면 '폐허'라고 할 수 있음이 분명한 흔적들로만 확인된다.
Friday, 15 April 2011
오늘
도심 한복판의 환승센터는 너무 복잡했다. 버스번호에 맞는 정류장을 못찾아서 결국 좌석버스 대신 시내버스와 택시의 조합을 선택해야 했다. 처음 가는 것도 아니건만, 다른 경로를 택하면서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탓이었다. 시내버스가 다니는 길목마다 차가 막혔다. 얼른 일을 끝내고 쉬고싶은 생각 뿐이던 지친 마음의 내가 그냥 돌아가자고 몇 번씩이나 속삭였다. 그때마다 내 안의, 어른인 척 하는 모범생이 원래 다 이런거니까 그냥 참으라고 다독였다. 정말 지랄맞고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손끝 한 마디가 두껍게 칠해진 하얀 장갑을 끼고 문서고를 뒤졌다. 페인트칠 두께만큼 두꺼워진 손끝으로 착착 넘어가는 종이의 감촉과 소리가 경쾌하다고 느끼다가도, 자주 멈춰,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답을 물었다. 나와의 통화에서도 늘 경쾌하던 담당선생님의 활기찬 전화 목소리에 맞춰, 원래 찾으려던 것이 아닌 문서들에 더 많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눈을 깜박이며 스며나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나는 다시 정말 미련하고 지랄맞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족한 잠을 좀 채울까 했는데, 얼핏 들었던 잠이 딴 생각에 깼다. (잠에서 깨어나서 생각한 것도 아니고, 생각 때문에 잠에서 깨다니, 신기한 일이다.) 이번에도 공모에서 탈락한 걸 확인했다. 요즘은 왜 맨날 떨어지는거지, 생각하다가, 아, 선생님과 신청한 건 안떨어졌구나 생각이 불쑥 났다. 정말 지랄맞다.
Sunday, 10 April 2011
왜 죽으면 안되나요?
각 대학 교수와 학생들의 자살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주로 이슈화되고 있는 건 KAIST지만 그 대학만의 일이 아니니 그렇게 구체화 시킬 수만은 없다) '왜 죽으면 안되나요?'라는 질문이 발칙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앞선 죽음들과 함께 이 질문이 던져져야만 이 죽음들이 '사건'으로 축소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방사능 관리에 소홀하기, 보다는, 아예 관심도 없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이건 분명 자본과 노동의 문제일 테다. 노동'인력'들은 그 노동으로 인해 죽기 직전까지만, 그래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괴로워야 하니까. 그렇다면, 거대해지고 있는 '정신건강' 사업은 노동인구들을 어디까지 내모는 게 죽기 직전까지의 정도일까 하는 궁금증으로 국가가 운영하고 있는 실험실 같은 게 아닐까.
과거와는 다른 의미에서 죽음의 굿판이 주요한 운동 방식으로 대두되는건가 싶은 불안감이 언뜻 스쳤다. 마음의 병과 죽음을 관리할 '필요'가 없는 통치 방식은 대체 저기 너머너머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무튼 이 '산업', 연구해 볼 일일세. 상반기 연구목표! (또 일벌렸어T_T)
Monday, 28 March 2011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대학원에 들어와서 연구실에서 혼자 처음으로 밤을 샐 때, 이 시는 아니지만, 브레히트의 시를 여러번 읽었다. 그런데, 온 힘을 다해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는 것도 아니면서, 슬금슬금 도망치고 있는 지금은, 그냥 마주하는 것만도 힘이 부친다. 내가, 필요한가?
Sunday, 27 March 2011
해석으로 가득찬 세계
그 곳엔 판자에 시멘트를 부어 집모양을 만든 뒤 비닐로 문과 창문을 덧대어 놓은 집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나는 회벽에 페인트로 적어둔 글씨체가 참 바르던 솜틀집을 가장 좋아했다. 그 골목을 따라오다 보면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엄마 심부름으로 병을 팔아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곤 했다. 가끔은 앞에 쌓여있는 병 핑계대고 그냥 먹기도 했다-_-. 주인분들은 알면서도 가끔은 넘기고, 가끔은 화를 내며 쫓아냈는데, 화를 내시면 다음 번 심부름 때엔 병을 멀리 떨어진 다른 가게에 팔아버렸다-_-. 아무튼, 그 가게 옆의 화분집(역시 시멘트를 부어 만든 집이었는데 집 앞에 화분이 많이 있었다)에는 내가 유치원생일 때 놀이터에서 그네를 태워주다가 몇년 뒤 군대로 끌려간 오빠(?)가 살았고, 그 뒤에 있던 빌라에는 한겨울에 치마를 입어놓고는 '멋 부리다가 얼어죽겠네'라고 중얼거려서(무려 초등학교 1학년이!) 구멍가게 아줌마를 자지러지게 만든 친구가 살았다.
이 동네는 2~3년 전쯤, 한바탕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 모두 철거되었다. 사실 내가 살던 때에도, 그러니까 15년 전에도 내가 살던 집에는 이미 무수한 금(균열)들이 있었고, 바로 앞에 큰 아파트를 만든다며 몇 달 내내 집들과 산을 폭파하던 때에는 주민들이 다들 집 무너지는 거 아니냐며 걱정할 정도였다. 그런데 폭발음과 함께 가끔 흔들리던 그 집은 그 이후 15년 동안, 고의로 철거하기 전까진,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 동네의 철거를 생각하면, 약하고 위험해 보였지만 오랜 시간동안 무너지지 않던 집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더 이상하게, 내가 살던 집이 철거된 것보다, 그 튼튼하고 정갈해보이던(맨 시멘트에 비닐로 문, 창문, 지붕을 덮은 집인데, 정갈해 보일 리가 없다- 분명 글씨 탓이다) 솜틀집이 철거된 게 가장 슬프다.
무슨 이유인지, 이 동네 이야기는 이렇게, 장황해진다.
여기부터가 본론인데, 그 동네에 살 때 내 가방에는 거의 항상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필름값은 물론이고 인화는 더더욱 비쌌을 시절이라, 필름이 들어있지 않은 카메라에 눈을 대고 카메라가 헛도는 소리를 들었던 적이 여러번이었다. 그래도 가끔 숙제나 여행 때문에 필름을 쓰게 될 때 몇 컷 정도가 여분으로 남으면, 인화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때 내가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하늘 사진이었다. 좋은 말로는 하늘, 나쁜 말로는, '허공'.
어느 날 우리 집에서 술을 드시던 아빠 친구가 내 심리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공허함 어쩌고 하면서. 사실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구름이 움직여 바뀌고, 하늘을 덮은 나무 그림자의 모양이, 농도가, 달라지는 게 신기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포스트를 쓴 건, 갑자기 이 일이 생각나면서, 해석으로 가득찬 세계에 살고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뭥미.
Wednesday, 23 February 2011
<우울증, 내 안의 파란 열정>
Monday, 21 February 2011
<만추>, 짧은 기록
Wednesday, 16 February 2011
The Golden Notebook
Friday, 11 February 2011
트라우마, 플레시 백, 앎
플레시 백 되는 것이 차라리 어떤 장면, 어떤 상황이었다면 조금은 더 나았을까. 내 속에 막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하나의 사건인 줄 알았다. 그리고 계속 출몰하는 그 장면을 지우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포기하지 말고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고, 문이 열리고 사후적으로 조작된 기억이 나를 살릴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 결과는 계속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누적된 외상은 사건, 장면만이 아니라, '감정에 사로잡힌 몸'으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가슴과 목의 통증과 막힘이 먼저, 그리고 사건과 장면이 나중에 출몰한다. 막힘과 벅차오름이 공존하는 감정적인 몸이 점점 일상적인 상태가 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대안'에 대한 강박도 심해져 간다.
문제는 내가 이 트라우마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데에 있는 것일까. 나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를 막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겼던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말이 독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든 끊어내야 한다는 감각, 끝낼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낀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답답함과 괴로움에, 내가 나를 해석하는 오만을 다시 부린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Thursday, 3 February 2011
그들이 사는 세상
그러나, 이렇게 일이 주는 설레임이 한 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다. 바로 권력을 만났을 때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라고 생각할 때, 사랑의 설레임은 물론, 사랑마저 끝이난다.
이 세상에 권력의 구조가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관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설레임이 설레임으로만 오래도록 남아있는 그런 관계가 과연, 있기는 한걸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일을 하는 관계에서 설레임을 오래 유지시키려면, 권력의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가 아닌, 오직 함께 일을 해나가는 동료임을 알 때, 설레임은 지속될 수 있다.
미치게 설레이던 첫사랑이 마냥 맘을 아프게만 하고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젠 설레임 같은건 별거 아니라고, 그것도 한때라고 생각할 수 있을만큼 철이 들만도 한데, 나는 또다시 어리석게 가슴이 뛴다. 그래도 성급해선 안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일은 지난 사랑에 대한 충분한 반성이다. 그것이 지나간 사랑에 대한, 다시 시작할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3화> 아킬레스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게 작품에 대한 진정성 아니에요? 배우에 대한 애정도 없이 어떻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가 있어? 우리들이 풀지 못한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게 작품에 녹아나야지. 옘병할 여기가 시장 바닥이야? 웬 장사!
이게 정지오 네가 말하는 의리냐? 이게 정지오 네가 작품마다 얘기하고 싶은 인간에 대한 예의냐? 남의 아킬레스건 틀어 쥐고, 다른 놈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사랑이 귀찮아질만큼 버겁다는 나레이션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를 묻고싶었는데, 지금이순간이 딱 그래. 선배 너는 너만 기분 좋음 네 앞에 있는 내가 어떤지 전혀 아랑곳 없어. 옛날에 나랑 헤어질때도 선배 넌 그랬어. 이제야 다 기억이 나. 그 때 넌 정말 잔인했는데, 내가 왜 그걸 잊고, 다시 시작하려고 했나 싶다.
지금 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의 아킬레스건은, 인정하긴 싫지만, 내가 너무 사랑을 정리하는 것도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애라는 거다. 하지만 이 순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이 사랑을 더는 쉽게 끝내고 싶지 않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날처럼 쉽게 오해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지루하더라도 다시 그와 긴 얘기를 시작한다면, 이번 사랑은 결코 지난 사랑과 같지 않을 수 있을까?
<4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녀들의 이야기
감독에게 있어서 새 작품을 만난다는 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실체를 찾아내 직면하지 않으면 작품은 시작부터 실패다. 왜 이 작품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지, 내가 찍어내는 캐릭터들은 어떤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왜 외로운지, 왜 깊은 잠을 못자고 설치는지, 사랑 얘기할 땐 캐릭터들의 성적 취향까지 고민해야 한다. 시청자들이야 별볼일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적어도 적어도 작품을 만드는 우리에게 작품 속 캐릭터는 때론 나 자신이거나 내 형제, 내 친구, 내 주변 누군가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 이 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게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없는데,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준영이를 안고있는 지금은 그 말이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더 얘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몸 안의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또 하나, 배워간다.
<5화> 내겐 너무도 버거운 순정
내가 잘해준 사람은 잊어도, 내가 상처준 사람은 절대 못 잊는게 사람이다.
그게 순정과 관계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애들도 아니고 어른한테 운명적, 숙명적, 첫사랑, 첫순정은 솔직히 포장 아니야?
결국은 안고 싶냐 안안고 싶냐 아니냐고. 딱까놓고 얘기해서, 욕정이지 무슨 순정?
생각해보면 나는 순정을 강요하는 한국 드라마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단 한번도 순정적이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왜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상대를 사랑하는 걸 그렇게 자존심 상해했을까. 내가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데. 뛰어오는 저 남자를 그냥 믿으면 되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
<6화> 산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너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이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 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60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7화> 드라마트루기
갈등 없는 드라마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최대한 갈등을 만들고, 그 갈등을 어설프게 풀지 말고, 점입가경 되게 상승시킬 것. 그것이 드라마의 기본이다. 드라마국에 와서 내가 또 하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얘기는, 드라마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드라마와 인생은 확실한 차이점을 보인다. 현실과 달리 드라마에서 갈등을 만나면 감독은 신이 난다. 드라마의 갈등은 늘 준비된 화해의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갈등만 만들 수 있다면, 싸워도 두려울 게 없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준비된 화해의 결말은 커녕 새로운 갈등만이 난무할 뿐이다.
<11화> 그의 한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이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 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준영일 다시 만나면서, 대체 내가 왜 예전에 얘랑 헤어졌을까, 이렇게 괜찮은 애를. 과거에 내가 미쳤었나 싶게,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천만번 다짐했다. 다신 얘랑 헤어지지 말아야지. 근데, 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내가 저질러 놓고도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한다. 난 내가 생각해도 좀 미친 것 같다.
<12화> 화이트 아웃
화이트 아웃을 인생에서 경험하게 될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잠시, 모든 하던 행동을 멈춰야만 한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이 울음을 멈춰야 한다. 근데, 나는 멈출 수가 없다. 그가 틀렸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6년 전, 그와 헤어질 때는, 솔직히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 때 그는, 단지, 날 설레게 하는 애인일 뿐이었다. 보고싶고, 만지고 싶고, 그와 함께 웃고싶고, 그런 걸 못하는 건, 힘은 들어도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젊은 연인들의 이별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미련하게도, 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주었다. 그게 잘못이다. 그는 나의 애인이었고, 내 인생의 멘토였고, 내가 가야할 길을 먼저 간 선배였고,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욕조에 떨어지는 물보다 더 따뜻했다. 이건 분명한 배신이다.
그 때,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 그와 헤어진 게 너무도 다행인 몇가지 이유가 생각난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고작 두어가지인데, 그와 헤어져선 안되는 이유는 왜 이렇게 셀수도 없이 무차별 폭격처럼 쏟아지는가. 이렇게 외로울 때, 친구를 불러 도움을 받는 것조차 그에게서 배웠는데, 친구 앞에선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져도 된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는데, 날 이렇게 작고 약하게 만들어 놓고, 그가 잔인하게 떠났다.
"그래서 네 말의 요점은, 내가 강준기에서 정지오로, 정지오에서 다시 누군가로 옮겨다니는 관계를 연속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관계연속 중독증을 앓고 있으며, 내가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기는 이 증세는 금단현상 같으니까, 고만 청승떨고 징징대지 말아라?" "아뇨" "그럼 뭐야?" "중독도, 금단도, 다 이해하니까, 더 울고불고 하셔도 된다구요."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면, 모든 게 제로로 돌아가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애인과 헤어진 것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걸 모르고 아이처럼 나를 보고 좋아라 하는 이 어른들을 보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이 든다. 남도 아니고, 내 부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젠, 사랑하는 애인의 부모도 아니고. 모든 게 끝나버린, 애인의 부모는 정말 어떻게 대해야 하는건지. 예상치 못한 이별의 후유증이, 곳곳에서 난무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건지.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나는 저 아이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14화>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몇 가지
나는 한때, 처음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한번, 두번,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구부려지고,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만 해도 인생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 번 천 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준영이의 모습이 그렇다.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너무나도 낯선 이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걸까.
대체 다른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들과 어떻게 헤어지는걸까? 연희와도, 준영과도, 이번이 처음 이별이 아닌데. 왜 이렇게 매 순간이 처음처럼 당혹스러운 건지. 모든 사랑이 첫사랑인것처럼, 모든 이별도 첫이별처럼 낯설고 당혹스럽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만 이런건가, 준영이는 너무나도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데 정말 길들여지지 않는 건 바로 이런거다. 뻔히 준영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하나도 모르는 척, 이렇게 끝까지 준영이 속을 뒤집는, 뒤틀린 나 자신을 보는 것. 사랑을 하면서 알게되는 내 이런 뒤틀린 모습들은, 정말이지 길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만하자고,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 만나자고, 처음엔 알았는데 이젠 나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안고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왜 나는 자꾸 이상한 말만 하는건지.
할만큼 다 했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보다. 야. 갑자기, 선배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지겨워진다. 그래. 그만 정리 하자. 정리해.
<15화> 통속, 신파, 유치찬란
가만 보면 입만 살았어. 말빨 세다구. 본인은 그렇게 안살거면서 그저 입만. 드라마가 인생이라고? 드라마가 구라 아니고? 본인같으면 어떡할 거 같아? 자신보다 더 잘살고, 자신보다 영리하고, 자신보다 순수하고, 자신보다 사랑에 진지한 여자, 솔직히 버겁고 쪽팔려서 도망치고 싶지 안하? 조태일처럼 진솔하게, 그렇겐 못하지? 조태일은 환상이지? 드라마가 환상인 것처럼, 그치?
선배, 지금까지 나, 양수경, 민희, 병욱이, 철희, 그런 후배들한테 뭐라그랬어? 작품 따로 인생 따로 살지 말라고 했지? 작품은 그 사람의 인생이어야 된다고 툭하면 침튀어가며 열변 토했지? 드라마가 뭐 별거냐, 대충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발라서 시청률만 잘나오면 되지 거기에 무슨 인생이 있어, 그렇게 살면 나 편했어. 근데, 너 기어이 나 설득시켜서 니 편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선배 넌 어떻게 살았어? 아까 그 작품만 해도 그래. 중산층 중년 부부의 쓸쓸함을 말한다고? 가질거 다 가져도 인생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게 인생이라고? 그럼 남들 보기에 가질 거 다 가진 우리 엄마도 쓸쓸함은 있겠네? 그걸 진짜 니가, 이해 해? 게다가, 새로 할 드라마는, 진정한 사랑 얘기라고? 죽음을 넘나드는. 야. 지 여자친구가 지 기좀 죽이게 잘산다고 순간의 쪽팔림도 못이겨서 전전날까지 부등켜 안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그만 끝내자고 말한 니가? 야, 말도 정도껏 뻔지르르 하게 해. 애인 잃은 것도 화나 죽겠는데, 하늘같이 존경한 선배가,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구라였다는 걸 인정하기까지는 나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 건드리지 마. 알았어?
<16화> 드라마처럼 사는 법3
언젠가 지오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모든 드라마의 모든 엔딩은 해피엔딩밖에 없다고. 어차피 비극이 판치는 세상, 어차피 아플대로 아픈 인생, 구질스런 청춘, 그게 삶의 본질인줄은 이미 다 아는데, 드라마에서 왜 그걸 궂이 표현하겠느냐.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 할 가치가 없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비극이, 희망이 꿈꾸는 역설인 줄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 말한 선배 너는 지금 어떠냐고. 희망을, 믿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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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맞이 그사세 정주행 끝.
역시, 좋다. 말이 필요없다.
물성(物性)
책을 만드는 사람에게서 '책의 물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직접 책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야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자료의 물성'에 대해서는 조금씩 떨림을 느끼던 중이었다. 누렇게 낡아 곧 찢어질 것 같은 종이, 낯선 글자와 낙서들이 좋았다. 세상 그 어떤 물체보다, 귀퉁이마저 빼곡하게 낙서로 채워진, 그 더러운 종이들이 좋았다. 11월, 그 가을은 시간을 손으로 만질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였던거다. 단지 그 종이를 찾고/보고/만지고/느끼는 것만 좋았을 뿐이었던 거다. '떨림'이라는 건 그런거다. 아니, '물성'이라는 게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 그래서 그 떨림을 즐기고 물성을 좋아하려 할수록 내용을 들여다보기는 겁나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떨림은 사라지고 물성 자체의 아우라는 없어지니까.
공간이 달라졌고, 계절이 다르고, 검색 결과가 시원찮고, 원문이 아니라 글을 알아볼 수 없을만큼 뭉개진 복사지들만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란 거다. 아후, 그래서 내가 글러먹었다는 결론을 나더러 쓰라는 거냐 지금!
떨림과 물성을 찾아헤매는 내가 너무 비루하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