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3 February 2011

그들이 사는 세상

<2화> 설레임과 권력의 상관관계


그러나, 이렇게 일이 주는 설레임이 한 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다. 바로 권력을 만났을 때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라고 생각할 때, 사랑의 설레임은 물론, 사랑마저 끝이난다.

이 세상에 권력의 구조가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관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설레임이 설레임으로만 오래도록 남아있는 그런 관계가 과연, 있기는 한걸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일을 하는 관계에서 설레임을 오래 유지시키려면, 권력의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가 아닌, 오직 함께 일을 해나가는 동료임을 알 때, 설레임은 지속될 수 있다.


미치게 설레이던 첫사랑이 마냥 맘을 아프게만 하고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젠 설레임 같은건 별거 아니라고, 그것도 한때라고 생각할 수 있을만큼 철이 들만도 한데, 나는 또다시 어리석게 가슴이 뛴다. 그래도 성급해선 안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일은 지난 사랑에 대한 충분한 반성이다. 그것이 지나간 사랑에 대한, 다시 시작할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3화> 아킬레스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게 작품에 대한 진정성 아니에요? 배우에 대한 애정도 없이 어떻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가 있어? 우리들이 풀지 못한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게 작품에 녹아나야지. 옘병할 여기가 시장 바닥이야? 웬 장사!


이게 정지오 네가 말하는 의리냐? 이게 정지오 네가 작품마다 얘기하고 싶은 인간에 대한 예의냐? 남의 아킬레스건 틀어 쥐고, 다른 놈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사랑이 귀찮아질만큼 버겁다는 나레이션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를 묻고싶었는데, 지금이순간이 딱 그래. 선배 너는 너만 기분 좋음 네 앞에 있는 내가 어떤지 전혀 아랑곳 없어. 옛날에 나랑 헤어질때도 선배 넌 그랬어. 이제야 다 기억이 나. 그 때 넌 정말 잔인했는데, 내가 왜 그걸 잊고, 다시 시작하려고 했나 싶다.



지금 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의 아킬레스건은, 인정하긴 싫지만, 내가 너무 사랑을 정리하는 것도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애라는 거다. 하지만 이 순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이 사랑을 더는 쉽게 끝내고 싶지 않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날처럼 쉽게 오해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지루하더라도 다시 그와 긴 얘기를 시작한다면, 이번 사랑은 결코 지난 사랑과 같지 않을 수 있을까?


<4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녀들의 이야기


감독에게 있어서 새 작품을 만난다는 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실체를 찾아내 직면하지 않으면 작품은 시작부터 실패다. 왜 이 작품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지, 내가 찍어내는 캐릭터들은 어떤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왜 외로운지, 왜 깊은 잠을 못자고 설치는지, 사랑 얘기할 땐 캐릭터들의 성적 취향까지 고민해야 한다. 시청자들이야 별볼일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적어도 적어도 작품을 만드는 우리에게 작품 속 캐릭터는 때론 나 자신이거나 내 형제, 내 친구, 내 주변 누군가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 이 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게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없는데,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준영이를 안고있는 지금은 그 말이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더 얘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몸 안의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또 하나, 배워간다.





<5화> 내겐 너무도 버거운 순정


내가 잘해준 사람은 잊어도, 내가 상처준 사람은 절대 못 잊는게 사람이다.
그게 순정과 관계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애들도 아니고 어른한테 운명적, 숙명적, 첫사랑, 첫순정은 솔직히 포장 아니야?
결국은 안고 싶냐 안안고 싶냐 아니냐고. 딱까놓고 얘기해서, 욕정이지 무슨 순정?



생각해보면 나는 순정을 강요하는 한국 드라마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단 한번도 순정적이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왜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상대를 사랑하는 걸 그렇게 자존심 상해했을까. 내가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데. 뛰어오는 저 남자를 그냥 믿으면 되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




<6화> 산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너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이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 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60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7화> 드라마트루기


갈등 없는 드라마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최대한 갈등을 만들고, 그 갈등을 어설프게 풀지 말고, 점입가경 되게 상승시킬 것. 그것이 드라마의 기본이다. 드라마국에 와서 내가 또 하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얘기는, 드라마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드라마와 인생은 확실한 차이점을 보인다. 현실과 달리 드라마에서 갈등을 만나면 감독은 신이 난다. 드라마의 갈등은 늘 준비된 화해의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갈등만 만들 수 있다면, 싸워도 두려울 게 없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준비된 화해의 결말은 커녕 새로운 갈등만이 난무할 뿐이다.

<11화> 그의 한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이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 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준영일 다시 만나면서, 대체 내가 왜 예전에 얘랑 헤어졌을까, 이렇게 괜찮은 애를. 과거에 내가 미쳤었나 싶게,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천만번 다짐했다. 다신 얘랑 헤어지지 말아야지. 근데, 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내가 저질러 놓고도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한다. 난 내가 생각해도 좀 미친 것 같다.


<12화> 화이트 아웃



화이트 아웃을 인생에서 경험하게 될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잠시, 모든 하던 행동을 멈춰야만 한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이 울음을 멈춰야 한다. 근데, 나는 멈출 수가 없다. 그가 틀렸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6년 전, 그와 헤어질 때는, 솔직히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 때 그는, 단지, 날 설레게 하는 애인일 뿐이었다. 보고싶고, 만지고 싶고, 그와 함께 웃고싶고, 그런 걸 못하는 건, 힘은 들어도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젊은 연인들의 이별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미련하게도, 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주었다. 그게 잘못이다. 그는 나의 애인이었고, 내 인생의 멘토였고, 내가 가야할 길을 먼저 간 선배였고,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욕조에 떨어지는 물보다 더 따뜻했다. 이건 분명한 배신이다.


그 때,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 그와 헤어진 게 너무도 다행인 몇가지 이유가 생각난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고작 두어가지인데, 그와 헤어져선 안되는 이유는 왜 이렇게 셀수도 없이 무차별 폭격처럼 쏟아지는가. 이렇게 외로울 때, 친구를 불러 도움을 받는 것조차 그에게서 배웠는데, 친구 앞에선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져도 된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는데, 날 이렇게 작고 약하게 만들어 놓고, 그가 잔인하게 떠났다.

<13화> 중독, 후유증, 그리고 혼돈




"그래서 네 말의 요점은, 내가 강준기에서 정지오로, 정지오에서 다시 누군가로 옮겨다니는 관계를 연속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관계연속 중독증을 앓고 있으며, 내가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기는 이 증세는 금단현상 같으니까, 고만 청승떨고 징징대지 말아라?" "아뇨" "그럼 뭐야?" "중독도, 금단도, 다 이해하니까, 더 울고불고 하셔도 된다구요."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면, 모든 게 제로로 돌아가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애인과 헤어진 것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걸 모르고 아이처럼 나를 보고 좋아라 하는 이 어른들을 보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이 든다. 남도 아니고, 내 부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젠, 사랑하는 애인의 부모도 아니고. 모든 게 끝나버린, 애인의 부모는 정말 어떻게 대해야 하는건지. 예상치 못한 이별의 후유증이, 곳곳에서 난무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건지.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나는 저 아이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14화>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몇 가지


나는 한때, 처음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한번, 두번,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구부려지고,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만 해도 인생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 번 천 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준영이의 모습이 그렇다.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너무나도 낯선 이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걸까.


대체 다른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들과 어떻게 헤어지는걸까? 연희와도, 준영과도, 이번이 처음 이별이 아닌데. 왜 이렇게 매 순간이 처음처럼 당혹스러운 건지. 모든 사랑이 첫사랑인것처럼, 모든 이별도 첫이별처럼 낯설고 당혹스럽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만 이런건가, 준영이는 너무나도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데 정말 길들여지지 않는 건 바로 이런거다. 뻔히 준영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하나도 모르는 척, 이렇게 끝까지 준영이 속을 뒤집는, 뒤틀린 나 자신을 보는 것. 사랑을 하면서 알게되는 내 이런 뒤틀린 모습들은, 정말이지 길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만하자고,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 만나자고, 처음엔 알았는데 이젠 나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안고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왜 나는 자꾸 이상한 말만 하는건지.




할만큼 다 했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보다. 야. 갑자기, 선배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지겨워진다. 그래. 그만 정리 하자. 정리해.



<15화> 통속, 신파, 유치찬란


가만 보면 입만 살았어. 말빨 세다구. 본인은 그렇게 안살거면서 그저 입만. 드라마가 인생이라고? 드라마가 구라 아니고? 본인같으면 어떡할 거 같아? 자신보다 더 잘살고, 자신보다 영리하고, 자신보다 순수하고, 자신보다 사랑에 진지한 여자, 솔직히 버겁고 쪽팔려서 도망치고 싶지 안하? 조태일처럼 진솔하게, 그렇겐 못하지? 조태일은 환상이지? 드라마가 환상인 것처럼, 그치?



선배, 지금까지 나, 양수경, 민희, 병욱이, 철희, 그런 후배들한테 뭐라그랬어? 작품 따로 인생 따로 살지 말라고 했지? 작품은 그 사람의 인생이어야 된다고 툭하면 침튀어가며 열변 토했지? 드라마가 뭐 별거냐, 대충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발라서 시청률만 잘나오면 되지 거기에 무슨 인생이 있어, 그렇게 살면 나 편했어. 근데, 너 기어이 나 설득시켜서 니 편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선배 넌 어떻게 살았어? 아까 그 작품만 해도 그래. 중산층 중년 부부의 쓸쓸함을 말한다고? 가질거 다 가져도 인생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게 인생이라고? 그럼 남들 보기에 가질 거 다 가진 우리 엄마도 쓸쓸함은 있겠네? 그걸 진짜 니가, 이해 해? 게다가, 새로 할 드라마는, 진정한 사랑 얘기라고? 죽음을 넘나드는. 야. 지 여자친구가 지 기좀 죽이게 잘산다고 순간의 쪽팔림도 못이겨서 전전날까지 부등켜 안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그만 끝내자고 말한 니가? 야, 말도 정도껏 뻔지르르 하게 해. 애인 잃은 것도 화나 죽겠는데, 하늘같이 존경한 선배가,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구라였다는 걸 인정하기까지는 나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 건드리지 마. 알았어?

<16화> 드라마처럼 사는 법3

언젠가 지오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모든 드라마의 모든 엔딩은 해피엔딩밖에 없다고. 어차피 비극이 판치는 세상, 어차피 아플대로 아픈 인생, 구질스런 청춘, 그게 삶의 본질인줄은 이미 다 아는데, 드라마에서 왜 그걸 궂이 표현하겠느냐.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 할 가치가 없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비극이, 희망이 꿈꾸는 역설인 줄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 말한 선배 너는 지금 어떠냐고. 희망을, 믿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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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맞이 그사세 정주행 끝.
역시, 좋다. 말이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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