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3 February 2011

<우울증, 내 안의 파란 열정>


"가끔은 이런 방법으로도 너를 지켜내야 할 필요가 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을 때,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곱씹었던 문장이다.

이 책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 책을 찾아 시크하게(?) 내 책상에 올려둔 친구의 따뜻함에 감동하고, 책 제목에 다시 한번 감동하고, 경험과 공감을 표하는 언어들에 다시 한 번 뭉클뭉클했던 책이다. 우울증이나 감정의 혹은 마음의 상태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하는 x가지 방법'이나 '~은 없다'류의 제목과 서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꺼려지기 마련인데, 이 책은 (정보를 나열하기만 한 부분도 있지만) 내가 잊고있는(잃어버린 게 아니라 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내 안의 힘이 무엇인지를 끌어내주려 노력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평이 지극히 주관적이듯이, 이 책은 눈과 머리로 정보를 읽기보다는 마음으로 경험과 감정을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끔찍한 단절감을 가져오는 마음의 병을 얻었을 때, 누구에게, 어떤 말로 혹은 어떤 글로 보듬어지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좋은 - 내게 맞는 - 상담가를 만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정말 배운 건 공감의 언어였다. 경험을 가진 자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어쩌면 이 '질병'에 한해서는 경험을 가진자만 말할 수 있을지도, 그런지도 모른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정해진 관계를 벗어나 나눴던 그 분의 경험은 내게 내려와 앉았다. 나와 세계가 분리되어 정지된 화면처럼 느껴지는 나락에서, 사람 한 명이 그 세계의 경계를 넘어 나에게 걸어온다는 건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지푸라기를 건져올리는 것보다 더 기적적인 경험이다.

(여기부터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날을 블로그에서 보여주는 것과 달리 3월 말이 다 되어서야 쓰는 글인데) 새로운 생활감에 젖어 사느라 다시 찾아온 깊은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꾸만 넘어지고 있을 때, 다시 새로운, 좋은 상담가를 만나 가끔은 위로받고, 가끔은 아픈 말을 듣고 있다. 이전의 상담들에서는 일단 살고보자는 절실함이 강했는데, 이제서야 나는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던 나를 대면한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보는 '강함'과 달리, 5초만 나를 들여다봐도 울음을 쏟아지는 내가 얼마나 취약한 인간인지, 내 안에 얼마나 여리고 미숙한 '아이'가 살고 있었는지.

그리고 또 알아간다. 말로만 알던 고통이라는 것을, 아픔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그것들이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단어들임을. 눈 앞이 깜깜하던 나에게 아주 짧은 미래도 생겼다. "상담이 끝날 때 쯤이면 이런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가장 마지막에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상담자가 나에게 자주 해주는 말이다.

이 시기를 잘 가꿔가고 싶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 이 책 외에도, 생일선물로 받은 <보이는 어둠>과, 룸메 책장에 꽂혀있던 한강의 소설들과 <사랑의 모든 것>, 노희경의 글과 말들도, 소중한 짝궁들이다.

Monday 21 February 2011

<만추>, 짧은 기록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 밥먹고 신용산까지 내려와서 급하게 본 영화 <만추>.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는 기대감에서, 음악만 남을듯한 영화라는 실망감으로 서서히 건너가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악평을 남기고 있는지 알겠다는 기분이 들었달까. 결과적으로 기대에 비해, 가능성에 비해 잘 만든 영화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감수성의 문제도 분명 있다. 범퍼카 장면, 포크 싸움 등 관객들이 일제히 (비)웃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 장면들을 보면 소위 견적이 나온다(?).

아쉬운 영화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든가, 포크 싸움이라든가, 기억에 남기고 싶을만한 장면들이 몇 가지 살아남았다. 아무려믄 그 장면장면보다도 이 영화에서 남기고 싶은 것은 음악과, 배우들의 목소리와, 소음이 아닌 것이 분명한- 소리들, 그리고 탕웨이의 다크서클과, 옷과, 안개가 온 몸으로 보여주는 늦은 가을의 감정선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기억이라고, 누군가는 추억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의 또 다른 동의어가 '집착'일 수도 있음을, 이 영화를 통해 깨달았다. 물론 내 몸은 그것을 반복하여 출몰하는 외상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지만, 다른 동의어들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포스팅을 이사날 아침 수북수북 쌓인 짐들 틈에 앉아 올리고 있다는 게, <만추>에 대한 짧은 기록의 완벽한 마무리인 것 같다. 물론, 긴 기록은 66년과 81년의 <만추>들을 보고 난 후에 계속.

Wednesday 16 February 2011

The Golden Notebook


레싱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벌써 아주 오래된 옛날로 느껴지는 2007년과 2008년 사이의 겨울이었다. 한 달 여정을 꾸리면서 겨우 작은 책가방 하나에 얇은 옷 두서너개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 이 책을 책가방 속 가장 무거운 짐으로 골라 넣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사람들로 빽빽하던 그 큰 서점에서, 한 학기동안 교과서 사며 모은 쿠폰을 탈탈 털어 쓰면서 어렴풋이 알아듣는 스웨덴어가 즐겁던 때였는데.

1크로나 짜리 비행기를 타겠다며 몇 번의 밤을 꼬박 세웠던 여러 나라 여러 도시의 공항들에서, 문 닫는 줄도 모르고 조용하다며 좋아하던 기차역에서, 한밤중의 24시 맥도널드에서, 쫓겨난 길거리에서, 이 책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잠 잘 곳을 찾아 벤치에서 벤치를 전전하던 그 버스정류장 한 귀퉁이, 나와 같은 책을 읽고 있던 어떤 여자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도시들과 이 책의 기억들은 이렇게 이어져 있다. 여러 사람에게 속고, 따지고, 도망가고, 이 나라에선 비올 때 이 나라에선 눈올 때 길바닥에서 울음을 쏟아내면서도 무서울 것 없는 것처럼 쏘다니던 때였다. 그 때는, 내 안에 어떤 힘이, 있었던 것 같다.

늘 머리 맡에 두었지만 다시 펼쳐보지는 않았던 이 책을, 어제 문득 꺼내보았다. 주인공의 이름도,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귀퉁이마다 작게 표시해놓은 화살표들을 따라가다보니, 그 때 좋아했던 문장에 지금도 마음이 울리더라.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 이 블로그 제목만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기억을 정리하고 싶었다.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던 그 해 여행의 유일한 기록^^

Friday 11 February 2011

트라우마, 플레시 백, 앎

나는 나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이 '알고있다'는 감각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플레시 백을 줄이는 데에, 플레시 백이 주는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기억을 끌어내고, 고통과 대면하고, 그것들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공유해 가는 증언 공간이 생각보다 미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앎'이 '이해'로, '이해'가 '치유'로 당연히 이어질 거라고 믿는 것은 제3자의 입장에서 경험을 다루는 자의 오만 아닌가.

플레시 백 되는 것이 차라리 어떤 장면, 어떤 상황이었다면 조금은 더 나았을까. 내 속에 막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하나의 사건인 줄 알았다. 그리고 계속 출몰하는 그 장면을 지우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포기하지 말고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고, 문이 열리고 사후적으로 조작된 기억이 나를 살릴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 결과는 계속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누적된 외상은 사건, 장면만이 아니라, '감정에 사로잡힌 몸'으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가슴과 목의 통증과 막힘이 먼저, 그리고 사건과 장면이 나중에 출몰한다. 막힘과 벅차오름이 공존하는 감정적인 몸이 점점 일상적인 상태가 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대안'에 대한 강박도 심해져 간다.

문제는 내가 이 트라우마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데에 있는 것일까. 나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를 막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겼던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말이 독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든 끊어내야 한다는 감각, 끝낼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낀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답답함과 괴로움에, 내가 나를 해석하는 오만을 다시 부린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Thursday 3 February 2011

그들이 사는 세상

<2화> 설레임과 권력의 상관관계


그러나, 이렇게 일이 주는 설레임이 한 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다. 바로 권력을 만났을 때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라고 생각할 때, 사랑의 설레임은 물론, 사랑마저 끝이난다.

이 세상에 권력의 구조가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관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설레임이 설레임으로만 오래도록 남아있는 그런 관계가 과연, 있기는 한걸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일을 하는 관계에서 설레임을 오래 유지시키려면, 권력의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가 아닌, 오직 함께 일을 해나가는 동료임을 알 때, 설레임은 지속될 수 있다.


미치게 설레이던 첫사랑이 마냥 맘을 아프게만 하고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젠 설레임 같은건 별거 아니라고, 그것도 한때라고 생각할 수 있을만큼 철이 들만도 한데, 나는 또다시 어리석게 가슴이 뛴다. 그래도 성급해선 안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일은 지난 사랑에 대한 충분한 반성이다. 그것이 지나간 사랑에 대한, 다시 시작할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3화> 아킬레스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게 작품에 대한 진정성 아니에요? 배우에 대한 애정도 없이 어떻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가 있어? 우리들이 풀지 못한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게 작품에 녹아나야지. 옘병할 여기가 시장 바닥이야? 웬 장사!


이게 정지오 네가 말하는 의리냐? 이게 정지오 네가 작품마다 얘기하고 싶은 인간에 대한 예의냐? 남의 아킬레스건 틀어 쥐고, 다른 놈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사랑이 귀찮아질만큼 버겁다는 나레이션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를 묻고싶었는데, 지금이순간이 딱 그래. 선배 너는 너만 기분 좋음 네 앞에 있는 내가 어떤지 전혀 아랑곳 없어. 옛날에 나랑 헤어질때도 선배 넌 그랬어. 이제야 다 기억이 나. 그 때 넌 정말 잔인했는데, 내가 왜 그걸 잊고, 다시 시작하려고 했나 싶다.



지금 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의 아킬레스건은, 인정하긴 싫지만, 내가 너무 사랑을 정리하는 것도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애라는 거다. 하지만 이 순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이 사랑을 더는 쉽게 끝내고 싶지 않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날처럼 쉽게 오해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지루하더라도 다시 그와 긴 얘기를 시작한다면, 이번 사랑은 결코 지난 사랑과 같지 않을 수 있을까?


<4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녀들의 이야기


감독에게 있어서 새 작품을 만난다는 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실체를 찾아내 직면하지 않으면 작품은 시작부터 실패다. 왜 이 작품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지, 내가 찍어내는 캐릭터들은 어떤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왜 외로운지, 왜 깊은 잠을 못자고 설치는지, 사랑 얘기할 땐 캐릭터들의 성적 취향까지 고민해야 한다. 시청자들이야 별볼일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적어도 적어도 작품을 만드는 우리에게 작품 속 캐릭터는 때론 나 자신이거나 내 형제, 내 친구, 내 주변 누군가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 이 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게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없는데,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준영이를 안고있는 지금은 그 말이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더 얘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몸 안의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또 하나, 배워간다.





<5화> 내겐 너무도 버거운 순정


내가 잘해준 사람은 잊어도, 내가 상처준 사람은 절대 못 잊는게 사람이다.
그게 순정과 관계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애들도 아니고 어른한테 운명적, 숙명적, 첫사랑, 첫순정은 솔직히 포장 아니야?
결국은 안고 싶냐 안안고 싶냐 아니냐고. 딱까놓고 얘기해서, 욕정이지 무슨 순정?



생각해보면 나는 순정을 강요하는 한국 드라마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단 한번도 순정적이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왜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상대를 사랑하는 걸 그렇게 자존심 상해했을까. 내가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데. 뛰어오는 저 남자를 그냥 믿으면 되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




<6화> 산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너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이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 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60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7화> 드라마트루기


갈등 없는 드라마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최대한 갈등을 만들고, 그 갈등을 어설프게 풀지 말고, 점입가경 되게 상승시킬 것. 그것이 드라마의 기본이다. 드라마국에 와서 내가 또 하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얘기는, 드라마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드라마와 인생은 확실한 차이점을 보인다. 현실과 달리 드라마에서 갈등을 만나면 감독은 신이 난다. 드라마의 갈등은 늘 준비된 화해의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갈등만 만들 수 있다면, 싸워도 두려울 게 없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준비된 화해의 결말은 커녕 새로운 갈등만이 난무할 뿐이다.

<11화> 그의 한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이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 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준영일 다시 만나면서, 대체 내가 왜 예전에 얘랑 헤어졌을까, 이렇게 괜찮은 애를. 과거에 내가 미쳤었나 싶게,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천만번 다짐했다. 다신 얘랑 헤어지지 말아야지. 근데, 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내가 저질러 놓고도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한다. 난 내가 생각해도 좀 미친 것 같다.


<12화> 화이트 아웃



화이트 아웃을 인생에서 경험하게 될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잠시, 모든 하던 행동을 멈춰야만 한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이 울음을 멈춰야 한다. 근데, 나는 멈출 수가 없다. 그가 틀렸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6년 전, 그와 헤어질 때는, 솔직히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 때 그는, 단지, 날 설레게 하는 애인일 뿐이었다. 보고싶고, 만지고 싶고, 그와 함께 웃고싶고, 그런 걸 못하는 건, 힘은 들어도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젊은 연인들의 이별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미련하게도, 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주었다. 그게 잘못이다. 그는 나의 애인이었고, 내 인생의 멘토였고, 내가 가야할 길을 먼저 간 선배였고,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욕조에 떨어지는 물보다 더 따뜻했다. 이건 분명한 배신이다.


그 때,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 그와 헤어진 게 너무도 다행인 몇가지 이유가 생각난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고작 두어가지인데, 그와 헤어져선 안되는 이유는 왜 이렇게 셀수도 없이 무차별 폭격처럼 쏟아지는가. 이렇게 외로울 때, 친구를 불러 도움을 받는 것조차 그에게서 배웠는데, 친구 앞에선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져도 된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는데, 날 이렇게 작고 약하게 만들어 놓고, 그가 잔인하게 떠났다.

<13화> 중독, 후유증, 그리고 혼돈




"그래서 네 말의 요점은, 내가 강준기에서 정지오로, 정지오에서 다시 누군가로 옮겨다니는 관계를 연속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관계연속 중독증을 앓고 있으며, 내가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기는 이 증세는 금단현상 같으니까, 고만 청승떨고 징징대지 말아라?" "아뇨" "그럼 뭐야?" "중독도, 금단도, 다 이해하니까, 더 울고불고 하셔도 된다구요."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면, 모든 게 제로로 돌아가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애인과 헤어진 것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걸 모르고 아이처럼 나를 보고 좋아라 하는 이 어른들을 보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이 든다. 남도 아니고, 내 부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젠, 사랑하는 애인의 부모도 아니고. 모든 게 끝나버린, 애인의 부모는 정말 어떻게 대해야 하는건지. 예상치 못한 이별의 후유증이, 곳곳에서 난무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건지.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나는 저 아이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14화>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몇 가지


나는 한때, 처음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한번, 두번,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구부려지고,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만 해도 인생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 번 천 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준영이의 모습이 그렇다.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너무나도 낯선 이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걸까.


대체 다른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들과 어떻게 헤어지는걸까? 연희와도, 준영과도, 이번이 처음 이별이 아닌데. 왜 이렇게 매 순간이 처음처럼 당혹스러운 건지. 모든 사랑이 첫사랑인것처럼, 모든 이별도 첫이별처럼 낯설고 당혹스럽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만 이런건가, 준영이는 너무나도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데 정말 길들여지지 않는 건 바로 이런거다. 뻔히 준영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하나도 모르는 척, 이렇게 끝까지 준영이 속을 뒤집는, 뒤틀린 나 자신을 보는 것. 사랑을 하면서 알게되는 내 이런 뒤틀린 모습들은, 정말이지 길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만하자고,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 만나자고, 처음엔 알았는데 이젠 나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안고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왜 나는 자꾸 이상한 말만 하는건지.




할만큼 다 했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보다. 야. 갑자기, 선배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지겨워진다. 그래. 그만 정리 하자. 정리해.



<15화> 통속, 신파, 유치찬란


가만 보면 입만 살았어. 말빨 세다구. 본인은 그렇게 안살거면서 그저 입만. 드라마가 인생이라고? 드라마가 구라 아니고? 본인같으면 어떡할 거 같아? 자신보다 더 잘살고, 자신보다 영리하고, 자신보다 순수하고, 자신보다 사랑에 진지한 여자, 솔직히 버겁고 쪽팔려서 도망치고 싶지 안하? 조태일처럼 진솔하게, 그렇겐 못하지? 조태일은 환상이지? 드라마가 환상인 것처럼, 그치?



선배, 지금까지 나, 양수경, 민희, 병욱이, 철희, 그런 후배들한테 뭐라그랬어? 작품 따로 인생 따로 살지 말라고 했지? 작품은 그 사람의 인생이어야 된다고 툭하면 침튀어가며 열변 토했지? 드라마가 뭐 별거냐, 대충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발라서 시청률만 잘나오면 되지 거기에 무슨 인생이 있어, 그렇게 살면 나 편했어. 근데, 너 기어이 나 설득시켜서 니 편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선배 넌 어떻게 살았어? 아까 그 작품만 해도 그래. 중산층 중년 부부의 쓸쓸함을 말한다고? 가질거 다 가져도 인생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게 인생이라고? 그럼 남들 보기에 가질 거 다 가진 우리 엄마도 쓸쓸함은 있겠네? 그걸 진짜 니가, 이해 해? 게다가, 새로 할 드라마는, 진정한 사랑 얘기라고? 죽음을 넘나드는. 야. 지 여자친구가 지 기좀 죽이게 잘산다고 순간의 쪽팔림도 못이겨서 전전날까지 부등켜 안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그만 끝내자고 말한 니가? 야, 말도 정도껏 뻔지르르 하게 해. 애인 잃은 것도 화나 죽겠는데, 하늘같이 존경한 선배가,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구라였다는 걸 인정하기까지는 나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 건드리지 마. 알았어?

<16화> 드라마처럼 사는 법3

언젠가 지오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모든 드라마의 모든 엔딩은 해피엔딩밖에 없다고. 어차피 비극이 판치는 세상, 어차피 아플대로 아픈 인생, 구질스런 청춘, 그게 삶의 본질인줄은 이미 다 아는데, 드라마에서 왜 그걸 궂이 표현하겠느냐.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 할 가치가 없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비극이, 희망이 꿈꾸는 역설인 줄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 말한 선배 너는 지금 어떠냐고. 희망을, 믿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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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맞이 그사세 정주행 끝.
역시, 좋다. 말이 필요없다.

물성(物性)

마음에 어떤 열정도 일지 않는 시간은 마주하기가 매우 당혹스럽다. 먹먹한 감정을 눈치채는 것이야말로 내가 나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책을 만드는 사람에게서 '책의 물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직접 책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야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자료의 물성'에 대해서는 조금씩 떨림을 느끼던 중이었다. 누렇게 낡아 곧 찢어질 것 같은 종이, 낯선 글자와 낙서들이 좋았다. 세상 그 어떤 물체보다, 귀퉁이마저 빼곡하게 낙서로 채워진, 그 더러운 종이들이 좋았다. 11월, 그 가을은 시간을 손으로 만질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였던거다. 단지 그 종이를 찾고/보고/만지고/느끼는 것만 좋았을 뿐이었던 거다. '떨림'이라는 건 그런거다. 아니, '물성'이라는 게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 그래서 그 떨림을 즐기고 물성을 좋아하려 할수록 내용을 들여다보기는 겁나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떨림은 사라지고 물성 자체의 아우라는 없어지니까.

공간이 달라졌고, 계절이 다르고, 검색 결과가 시원찮고, 원문이 아니라 글을 알아볼 수 없을만큼 뭉개진 복사지들만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란 거다. 아후, 그래서 내가 글러먹었다는 결론을 나더러 쓰라는 거냐 지금!

떨림과 물성을 찾아헤매는 내가 너무 비루하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