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14 August 2009

20090810_벨훅스 읽기, 준비.

움직이지 않는 핸드레일 위를 걸으면서 현기증을 두 번이나 느꼈다. 내가 뒤로 넘어가는 느낌. 무언가를 잡지 않으면 나를 지탱해낼 수 없을 듯한, 그런 흔치 않은 느낌 말이다. 깜박이는 정신을 여름이란 계절 탓으로 돌리며 7시간의 노동을 마치고, 뒤늦은 점심 혹은 때이른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작은 분식집에 들어간다. 선풍기 앞에 자리를 잡자니, 전화기가 쉴새 없이 울려댄다. 책 읽기는 글렀다. 아침에는 발견하지 못한 날파리 시체가 붙어있는 신문을 펴든다. 날파리의 잔해를 슥 닦아내고 정치면을 대강 훑어낸다. 그리고 '시대를 읽고 현실을 들춰내어 심금을 울리고 있다'는 스타 여성작가 3인에 대한 기사에서 멈춰선다. 몇 달을 신경숙 소설만 내리 읽다가,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는 어느 착한 여자(들)의 같은 시대(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 지겹다며 책을 던져버린게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 시절의 내가 도대체 무엇을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신경숙과 김영하와 공지영과 히라노 게이치로 따위를 읽어댔다. 이 무렵의 무분별한 독서는 동네 책방에서 빌릴 수 있는 책들만 읽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내가 헤매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듯, 나의 중학교 시절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평범하지도 않았다고 믿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평범했을 것이다. 1학년 담임선생이기도 했던 체육 선생은 아이들의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해, 벌을 줄 때는 항상 운동장을 같이 쓰는 바로 옆의 남학교 축구골대까지 뛰어갔다 오게 했다. 하키부였던 친구들은 하키 스틱으로 선배들과 코치 선생에게 맞아 늘 절뚝거렸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좁고 긴 골목에서,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은 한 데 얽혀 선생들 몰래 담배를 피우고 연애질을 했다. 졸업 무렵에는 아직도 얼굴이 기억날 정도로 눈이 부시게 예뻤던, 자퇴한 그 아이가 임신을 했더라는 소문도 들려왔다. 몇몇 아이들은 교실 앞뒤에서 포옹을 한 채로 한 데 누워 시간을 보냈다. 레즈비언이라든지 호모라든지 하는 정치적인 단어들이 오르내리지 않는 시절이었다. 연애라는 말이 성적으로 특권화된 계층에게 전유된 상황에서, 모든 것들은 '베프'라는 단어로 강변되었다. 규정의 언어들은 어찌됐든 우리와 관계 없는 이야기였던 그곳은 마치 작은 성역과도 같았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교환일기를 쓰고, 쉬는 시간이면 교실 바닥에 엉겨 누워있는 아이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 일기장을 날라댔다. 그러던 어느날 담배 연기가 자욱한 긴 골목을 통과했을 때, 하늘 위에서 치마가 펄럭였다. 도저히 1차선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그 좁은 골목에서 길을 건너던 아이가 차에 치였다. 가볍게 떠올랐던 아이에게선 엄청난 피가 흘렀다. 매일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다소 몽롱한 정신으로 소설 구절들을 읊어대던 나는, 그 이후 고등학교에 가게 되기 전까지 버스를 타지 않고 늘 걸어다녔다.

그 무렵의 나는 학교보다는 소설과 연극, 영화에 빠져있어서, 몇 년이고 자퇴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다 엄마의 눈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1년 여를 참아내던 엄마는 당신이 나에게 어떤 큰 잘못을 했냐고 울부짖으며 물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치 전설처럼, 나는 엄마가 매우 똑똑했으며, 대학에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삼촌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지 못한 채 공장에 다녀야 했다는 것도 알았다. 아빠 역시 결혼 이후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회사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아 공부를 포기하고 자퇴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97년 회사를 퇴직하고 시작한 아빠의 일이 아직 자리잡지 못했을 때였으니, 엄마의 원망이 더 컸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를 부등켜 안고 서럽게 울고 있는 현실이 너무 두려웠다. 엄마는 울어서도, 화를 내서도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하고싶었지만 못했던 일을 하기 싫어하는 딸이 끔찍하게 미워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애착이 강한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공포였다. 이후 나는 절대로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던 여느때의 그 엄마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 일을 절대로 다시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행복하다. 고등학교 1년을 더 앓은 뒤로 나는 미친 사람처럼 일과 공부만 하고 살아왔고, 그래서 엄마는 그 때 내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글과 연극과 영화를 포기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도 기적처럼 만난 사람, 내가 여전히 '진짜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까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한마디 덕분에, 나는 나의 삶 전부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는 내가 계속 글을 쓰기 바랐고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변화의 경계 앞에서 나는 늘 그녀와 그녀의 말들을 불러낸다. 지난 주말부터 벨훅스(경계넘기를 가르치기)를 읽으면서, 다시 그녀를 불러냈다. 벨훅스의 책은 오래전부터 언젠가 한 번 읽게 되겠거니 하고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박경환 교수의 블로그에서 보고 한 번, 민우와 얘기하다 또 한 번, 최근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겪어내면서 빠진 자괴감 때문에 다시 한 번 벨 훅스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고 나서, 결국 책을 잡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수가 자신들을 복잡한 삶을 살고 경험을 하는 완전한 인간 존재로 봐주기를 바랐으며 구획화된 지식의 조각을 좇는 사람으로 단순하게 치부되지를 원치 않았다(23)."

"지금 교사나 교수들이 아무에게도 자아성찰을 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누리는 호사나 특권 중 일부분이다(25)."

"교수님의 가르침 중 몇 가지는 책에서 배웠지만 대부분은 교수님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얻게 되었다(29)."

책을 잠시 덮었다.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서러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더이상 교환일기 따위를 쓰지 않고, 아무도 손을 잡은 채 교실 바닥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하지 않는 곳, 아무도 대화하지 않는 장소가 영영 계속되고 있다.

이글거리는 더위를 피해 역사로 들어선다. 긴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섰을 때부터 어느 여자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전화로 싸우나보다, 한다. 지르고 내뱉는 목소리는 상대방으로부터 이해받고 싶은 마음의 증거이므로. 그리고 선로에 도착해서야, 소리를 지르고 있는 어떤 젊은 여자를 본다.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갓난 아이를 들쳐 업은 어떤 '엄마'. 그 여자의 시어머니의 옷이라고 해도 믿겨질듯한 허름한 옷을 입고, 논볕에 검게 그을려 지친 얼굴을 한 그 여자가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말도 안들을 거면 왜 놀러가자고 하냐'고 아이를 다그친다. 나는 그 여자와 아이들을 등지고 걸으면서, 저들이 지금 서로에게 상처주고 상처받고 있으면서도, 그 가시들이 서로에게 돋힌 것은 아님을 알기만을 바랐다. 저 아이들이 이 다그침을 거절의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 여자가 울지 않기를 또 간절히 바랐다. 나도, 울고싶지 않다. 이것 저것 따질 필요도 없이, 서로에 대한 믿음만으로 서로와 서로의 상처와 서로가 주고 받는 상처를 이해하면서 수다떠는 것이 공부의 전부였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을 뿐. 나의 감수성이 메말라버린 것이,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가 너무 서럽다. 우린 어딜가나 경계인이라는 말만 메아리친다. 아, 정말 그런가.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 대해서는, 차마 쓸 수 없다. 차마 쓸 용기가 나질 않는다. 나는 나의 삶이 가지고 있는 질문들을 추적해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여기에선 아무도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 밖엔. 모든 게 내 탓이다. 도망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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