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30 August 2009

20090829_소수자 '되기'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기에, 나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는 글이나 사람을 접하면 무척 반갑다.

"소수자는 수적 소수 개념과는 무관한, 주류 다수자의 기득권 체제에 구멍을 내고 무너뜨려 바꾸려는 비주류 저항, 도전 세력이다. 그들은 소수자'이기'가 아닌 의식적 소수자 '되기' 운동을 통해 생성되는 존재이며, 차이를 동반하며 영원 회귀적으로 반복되는 다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차이를 동반하며 반복 등장한다. 이처럼 기성체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면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소수자 되기('새로운 모습으로의 귀환'), 이것이 바로 진보의 토대다," [한승동. 추모의 종이비행기에 지성의 동력을 달다(담론과 성찰1). 한겨레.]

늘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 놓을 것. 그리고 그 위에서 충분히 날뛰어 볼 것.

Saturday 29 August 2009

20090828_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졸업식을 마치고 피곤에 뒤덮인 상태에서 문화사회학회에 갔다. 발표 제목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발표자는 정수복 선생. 사실 발표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첫 단어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발표 제목이기도 했거니와, 내가 학회에 간 진실된 목적은 민우와 이나영 선생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발표문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 했을 뿐, 발표 제목과 같은 이름의 책이 이미 2007년에 발행되어, 이 속내 모를 세상 속에서 나름대로 유의미한 작업으로 부유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발표를 들으면서 불편하고, 불쾌했다.

1. 정수복 선생의 문제의식은 "그동안 한국의 사회운동이 계급, 불평등, 민주화 등의 거대 담론에만 주목했을 뿐, 가족주의, 연고주의, 학연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억압에는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 일견 동의할만한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논의가 위치하게 되는 맥락에 따라 사적 영역에서의 억압에 문제제기를 하는 운동'도' 거대하지 않은 수준으로 늘 있어왔다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한국의 사회운동이 제도개혁과 법개정을 중심으로 한 권력/정치지향적이었을 뿐, 문화적 수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문화와 권력을 별개의 것으로 치부한다.

2. 정수복 선생의 논의 범주는 변화하는 것보다는 변화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으로서 문화적 '문법'을 이야기 하는 것. 실제로 정수복 선생은 발표에서 가다머와 브로델을 인용하면서, 변동 패러다임보다 지속 패러다임을 연구할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문제설정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불편했던 것은 바로 그가 지속적으로 여러 대(남성)학자들의 이름과 연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지성을 뽐내려 들었다는 것이다. So what? 그는 많은 논의 지점들과 연구 결과들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3. 정수복 선생은 자신만의 '한국인' 담론을 세우기 위해, 한국인 행위패턴의 규칙을 6개(현세지향적,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의 '심층적, 문화적(근본적) 문법'과, 개화기 이후에 생긴 6개(사회진화론, 국가중심주의/감상적민족담론강화, 속도지상주의,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주의)의 '파생적 문법'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그 기원을 종교에서 찾는다.

→ 너무나도 자의적이고 의도적인 범주화다. 정수복 선생의 범주화를 비판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그가 고정된 문법으로서의 문화를 강조하면서 역사(첫번째 비판)와 권력(두번째 비판)의 문제를 탈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러한 문법을 어떻게 파괴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안은 당연히 나올 수가 없는 문제고. 문법이 지속-변형되는 (역사적) 현실에서 계속되는 것은 권력정치의 문제인데 그것을 간과하고 있으니.

→ 첫째, 심층적, 문화적 문법과 파생적 문법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개화기라는 시기가 왜 중요하게 강조되는가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개화기의 충격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화기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개벽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의 흐름('기')이다. 역사를 그렇게 단절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민족담론의 강화 등 역사적 분석이 필요한 것들이 많은데, 하나의 순간적이고 급작스러운 이벤트로서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둘째, 각각의 범주들이 완벽한 것이 아니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정의 정도가 너무 나이브하다. 관점에 따라, 권위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등)와 갈등회피주의는 별개의 것이라기 보다는 권위주의가 갈등회피주의를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갈등회피주의의 동의어는 '조화'가 아니라 갈등의 '묵인'이다. 문화적 수준에서도 권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권위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혹은 그의 문화와 문법이라는 개념이 권력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절대로 '사람들의 의견이 자유롭게 찬반으로 5:5로 나눠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의견은 찬/반이 아니며, 5:5도 될 수 없고, 어떠한 관계에서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주장을 개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4. 정수복 선생에 따르면, 기존 학자들의 유교 비판은 한국이 가난하게 된 원인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식민지가 된 원인이나 가족주의의 폐해를 지적하지 못했다.

→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 실제로 유교 비판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범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은 2번에서 제기된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그가 선택한 참고문헌은 이광수, 신채호 등의 유교 비판일 뿐이다. 정수복 선생은 너무 당연시해온 문법이라 문제제기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가 그러한 문제제기에 귀기울이지 않은 것 뿐이다. 분야로는 여성학자들, 시간적으로는 보다 현재에 가까운 시간 대역 내에서 발표되었던 수많은 학자들의 논의가 지워져 있다. 또한, 그가 제기하는 사료들(실제로 사료를 본 것도 아니니 역사적 참고문헌이라고 해야할까) 역시 국사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인의 문법'은 '국(nation 혹은 nationality)의 문법'이자 '남성 문법'이 된다.

5. 정수복 선생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개인보다 집합을 우선시하는 유교적 집단주의에 빠져있으므로, 개인의 고유성, 책임성, 주체성을 강조하는 서구 근대 개인주의로 문법이 '고쳐져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지속되는 것은 지구적 표준(global standard)에 맞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 개인주의 없는 집단주의적 문법에서 우리나라에는 보편적 인권사상이 존재한 적도 없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대립시키고 한 국가와 국민의 성향을 이런 식으로 위치시키는 것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참 오랜만이다. 동양의 전통적 주체가 갖는 집단주의만큼이나 서구의 근대적 주체와 고유성, 독립성을 등치시킬 수 있을지를 의심해봐야 하고, 그러려면 근대적 주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발화자의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이기 이전에 식민성의 문제라고 본다.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이분법에서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 '원래 그러한 것'과 '한국에만 오면 일어나는 돌연변이'라니. 나아가 오리엔탈리즘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한 대항담론으로서 옥시덴탈리즘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방어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재현의 문제는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재현이 있는가, 재현의 문제가 항상 재현의 위기로 이어지느냐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일테지만, 재현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항상 담론의 중추를 비판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 통치 사상으로서의 유교가 전개, 변형되는 과정에서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인권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최근에 글을 읽다 그만둔 게 있는데, 다 안읽어서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 대부분의 개념사에서 빨라야 개화기 수입품으로서, 느리면 해방 이후부터를 연구 범주로 잡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6. 그 밖의 비판들

→ 경험적 연구가 아니다. 게다가 실천과 제도적 맥락보다는 상징만을 강조한다. 경전 자체와 상징만을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실천의 맥락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법을 지켜나가야 하는 의무를 부담하게 되는 것은 여성이며, 한국에서의 기독교가 가족주의를 넘어선 적은 없었다. 정수복 선생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얘기하면서, 한국인의 문화가 기반하고 있는 (그러나 한국인들 그 누구도 꼼꼼히 읽지 않고 모두가 동일하게 읽어낼 수도 없으며 읽은 그대로 실천하지는 더더욱 않는) 텍스트의 문법만을 독해하고 있다.

→ '문화적 교양층'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문법으로서 기능하는 문화와 즐길 수 있는 것으로서의 문화를 혼용하고 있다. 특히 '문화적 교양층'에 여성들이 많이 해당되기 때문에 여성이 더 가능성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남성/과학/이성 vs. 여성/문화/감성의 이분법이 엿보였다.


이제서야 네이버 검색을 통해 책 정보를 알아보니, 평이 꽤 좋다. 수상한 세상. 유교가 난리는 난리다. 유교르네상스는 마치 젊음을 다 소비한 나이 많은 서구 백인 남성이 필리핀과 일본 등지에서 잘 '훈육된' 아시아 여성을 선호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지만, 그 반대에서의 논의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비판했다). 더더욱 수상한 세상. 한겨레에서 계속되고 있는 민족주의/애국주의 논쟁을 보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이곳도, 저곳도, 갈 곳이 없다. 좋게 말하면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니라서 여기서도 저기서도 욕먹는 상황. 결국, 이렇게 되는거지.

그래도 수상한 세상치곤 매우 즐거운 밤이었다. 첫째는, 발표를 들을때의 고통과 달리 토론 자리에서 (물론 다들 결론은 부실하게 봉합되었지만)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해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또 아이디어들이 튀어나갈 수 있었다는 점. 둘째는, 이나영 선생님과 함께 한 자리가 매우 좋았다는 점.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된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오늘 아침에서야 어떤 관계인지를 기억하게 된) 두 사람이 눈에 밟히고, 그들을 통해 어제의 일들이 스멀스멀 불편한 진실로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나도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아, 생각만 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

Monday 24 August 2009

방학이 끝나간다.

요즘엔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문득문득 궁금해지는 사람들이 몇 있다. 오늘은 오랫만에 원영선배의 다이어리를 읽다가 '그럼, 고진을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야 연구실 구석에 빌려다 둔 네이션과 미학을 떠올렸다. 내가 무척이나 게을러졌고 피곤해 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래서, 방명록을 적다 문득 생각했다.

"방학이 끝나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고, 기쁘다."

불안해서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고, 허리 휘어지게 과외만 했던 이번 방학은 내 생애 최악이었다. 몸은 지칠대로 지쳤고, 정작 내가 해야 할 것들은 하지 못했으며, 머리는 낡을대로 낡아버렸다. 대학원 진학 선택을 후회할만큼 절망적인 일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내가 나를 온전히 살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렸으며 그래서 자존감은 곤두박질 쳤다. 이런 저런 위치와 관계 속에 놓인 사람들을 겪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는 한편, 상대방이 원하고 상대방이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나대로 행동해야 했으므로.

그런데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집중해도 이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불안하다. 그러나 저러나, 주변에 좋은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을 끊임없이 비판에 노출시키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만큼 '대화'도 열심히 나누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다. 자극이 된다.

Friday 14 August 2009

20090810_벨훅스 읽기, 준비.

움직이지 않는 핸드레일 위를 걸으면서 현기증을 두 번이나 느꼈다. 내가 뒤로 넘어가는 느낌. 무언가를 잡지 않으면 나를 지탱해낼 수 없을 듯한, 그런 흔치 않은 느낌 말이다. 깜박이는 정신을 여름이란 계절 탓으로 돌리며 7시간의 노동을 마치고, 뒤늦은 점심 혹은 때이른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작은 분식집에 들어간다. 선풍기 앞에 자리를 잡자니, 전화기가 쉴새 없이 울려댄다. 책 읽기는 글렀다. 아침에는 발견하지 못한 날파리 시체가 붙어있는 신문을 펴든다. 날파리의 잔해를 슥 닦아내고 정치면을 대강 훑어낸다. 그리고 '시대를 읽고 현실을 들춰내어 심금을 울리고 있다'는 스타 여성작가 3인에 대한 기사에서 멈춰선다. 몇 달을 신경숙 소설만 내리 읽다가,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는 어느 착한 여자(들)의 같은 시대(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 지겹다며 책을 던져버린게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 시절의 내가 도대체 무엇을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신경숙과 김영하와 공지영과 히라노 게이치로 따위를 읽어댔다. 이 무렵의 무분별한 독서는 동네 책방에서 빌릴 수 있는 책들만 읽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내가 헤매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듯, 나의 중학교 시절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평범하지도 않았다고 믿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평범했을 것이다. 1학년 담임선생이기도 했던 체육 선생은 아이들의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해, 벌을 줄 때는 항상 운동장을 같이 쓰는 바로 옆의 남학교 축구골대까지 뛰어갔다 오게 했다. 하키부였던 친구들은 하키 스틱으로 선배들과 코치 선생에게 맞아 늘 절뚝거렸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좁고 긴 골목에서,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은 한 데 얽혀 선생들 몰래 담배를 피우고 연애질을 했다. 졸업 무렵에는 아직도 얼굴이 기억날 정도로 눈이 부시게 예뻤던, 자퇴한 그 아이가 임신을 했더라는 소문도 들려왔다. 몇몇 아이들은 교실 앞뒤에서 포옹을 한 채로 한 데 누워 시간을 보냈다. 레즈비언이라든지 호모라든지 하는 정치적인 단어들이 오르내리지 않는 시절이었다. 연애라는 말이 성적으로 특권화된 계층에게 전유된 상황에서, 모든 것들은 '베프'라는 단어로 강변되었다. 규정의 언어들은 어찌됐든 우리와 관계 없는 이야기였던 그곳은 마치 작은 성역과도 같았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교환일기를 쓰고, 쉬는 시간이면 교실 바닥에 엉겨 누워있는 아이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 일기장을 날라댔다. 그러던 어느날 담배 연기가 자욱한 긴 골목을 통과했을 때, 하늘 위에서 치마가 펄럭였다. 도저히 1차선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그 좁은 골목에서 길을 건너던 아이가 차에 치였다. 가볍게 떠올랐던 아이에게선 엄청난 피가 흘렀다. 매일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다소 몽롱한 정신으로 소설 구절들을 읊어대던 나는, 그 이후 고등학교에 가게 되기 전까지 버스를 타지 않고 늘 걸어다녔다.

그 무렵의 나는 학교보다는 소설과 연극, 영화에 빠져있어서, 몇 년이고 자퇴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다 엄마의 눈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1년 여를 참아내던 엄마는 당신이 나에게 어떤 큰 잘못을 했냐고 울부짖으며 물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치 전설처럼, 나는 엄마가 매우 똑똑했으며, 대학에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삼촌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지 못한 채 공장에 다녀야 했다는 것도 알았다. 아빠 역시 결혼 이후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회사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아 공부를 포기하고 자퇴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97년 회사를 퇴직하고 시작한 아빠의 일이 아직 자리잡지 못했을 때였으니, 엄마의 원망이 더 컸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를 부등켜 안고 서럽게 울고 있는 현실이 너무 두려웠다. 엄마는 울어서도, 화를 내서도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하고싶었지만 못했던 일을 하기 싫어하는 딸이 끔찍하게 미워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애착이 강한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공포였다. 이후 나는 절대로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던 여느때의 그 엄마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 일을 절대로 다시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행복하다. 고등학교 1년을 더 앓은 뒤로 나는 미친 사람처럼 일과 공부만 하고 살아왔고, 그래서 엄마는 그 때 내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글과 연극과 영화를 포기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도 기적처럼 만난 사람, 내가 여전히 '진짜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까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한마디 덕분에, 나는 나의 삶 전부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는 내가 계속 글을 쓰기 바랐고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변화의 경계 앞에서 나는 늘 그녀와 그녀의 말들을 불러낸다. 지난 주말부터 벨훅스(경계넘기를 가르치기)를 읽으면서, 다시 그녀를 불러냈다. 벨훅스의 책은 오래전부터 언젠가 한 번 읽게 되겠거니 하고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박경환 교수의 블로그에서 보고 한 번, 민우와 얘기하다 또 한 번, 최근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겪어내면서 빠진 자괴감 때문에 다시 한 번 벨 훅스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고 나서, 결국 책을 잡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수가 자신들을 복잡한 삶을 살고 경험을 하는 완전한 인간 존재로 봐주기를 바랐으며 구획화된 지식의 조각을 좇는 사람으로 단순하게 치부되지를 원치 않았다(23)."

"지금 교사나 교수들이 아무에게도 자아성찰을 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누리는 호사나 특권 중 일부분이다(25)."

"교수님의 가르침 중 몇 가지는 책에서 배웠지만 대부분은 교수님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얻게 되었다(29)."

책을 잠시 덮었다.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서러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더이상 교환일기 따위를 쓰지 않고, 아무도 손을 잡은 채 교실 바닥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하지 않는 곳, 아무도 대화하지 않는 장소가 영영 계속되고 있다.

이글거리는 더위를 피해 역사로 들어선다. 긴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섰을 때부터 어느 여자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전화로 싸우나보다, 한다. 지르고 내뱉는 목소리는 상대방으로부터 이해받고 싶은 마음의 증거이므로. 그리고 선로에 도착해서야, 소리를 지르고 있는 어떤 젊은 여자를 본다.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갓난 아이를 들쳐 업은 어떤 '엄마'. 그 여자의 시어머니의 옷이라고 해도 믿겨질듯한 허름한 옷을 입고, 논볕에 검게 그을려 지친 얼굴을 한 그 여자가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말도 안들을 거면 왜 놀러가자고 하냐'고 아이를 다그친다. 나는 그 여자와 아이들을 등지고 걸으면서, 저들이 지금 서로에게 상처주고 상처받고 있으면서도, 그 가시들이 서로에게 돋힌 것은 아님을 알기만을 바랐다. 저 아이들이 이 다그침을 거절의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 여자가 울지 않기를 또 간절히 바랐다. 나도, 울고싶지 않다. 이것 저것 따질 필요도 없이, 서로에 대한 믿음만으로 서로와 서로의 상처와 서로가 주고 받는 상처를 이해하면서 수다떠는 것이 공부의 전부였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을 뿐. 나의 감수성이 메말라버린 것이,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가 너무 서럽다. 우린 어딜가나 경계인이라는 말만 메아리친다. 아, 정말 그런가.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 대해서는, 차마 쓸 수 없다. 차마 쓸 용기가 나질 않는다. 나는 나의 삶이 가지고 있는 질문들을 추적해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여기에선 아무도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 밖엔. 모든 게 내 탓이다. 도망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