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28 March 2011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대학원에 들어와서 연구실에서 혼자 처음으로 밤을 샐 때, 이 시는 아니지만, 브레히트의 시를 여러번 읽었다. 그런데, 온 힘을 다해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는 것도 아니면서, 슬금슬금 도망치고 있는 지금은, 그냥 마주하는 것만도 힘이 부친다. 내가, 필요한가?

Sunday 27 March 2011

해석으로 가득찬 세계

중학교 3학년 때 아랫동네로 이사오기 전까지 살던, 말 그대로 남한산의 한 면을 깎아놓은 그 가파른 산꼭대기 동네는 온갖 이미지와 이야기로 가득찬 곳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던 골목은 오히려 자주 다니던 큰 길은 아니었는데도, 일부러 찾아다녀서인지 아직도 그림들이 생생하다.

그 곳엔 판자에 시멘트를 부어 집모양을 만든 뒤 비닐로 문과 창문을 덧대어 놓은 집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나는 회벽에 페인트로 적어둔 글씨체가 참 바르던 솜틀집을 가장 좋아했다. 그 골목을 따라오다 보면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엄마 심부름으로 병을 팔아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곤 했다. 가끔은 앞에 쌓여있는 병 핑계대고 그냥 먹기도 했다-_-. 주인분들은 알면서도 가끔은 넘기고, 가끔은 화를 내며 쫓아냈는데, 화를 내시면 다음 번 심부름 때엔 병을 멀리 떨어진 다른 가게에 팔아버렸다-_-. 아무튼, 그 가게 옆의 화분집(역시 시멘트를 부어 만든 집이었는데 집 앞에 화분이 많이 있었다)에는 내가 유치원생일 때 놀이터에서 그네를 태워주다가 몇년 뒤 군대로 끌려간 오빠(?)가 살았고, 그 뒤에 있던 빌라에는 한겨울에 치마를 입어놓고는 '멋 부리다가 얼어죽겠네'라고 중얼거려서(무려 초등학교 1학년이!) 구멍가게 아줌마를 자지러지게 만든 친구가 살았다.

이 동네는 2~3년 전쯤, 한바탕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 모두 철거되었다. 사실 내가 살던 때에도, 그러니까 15년 전에도 내가 살던 집에는 이미 무수한 금(균열)들이 있었고, 바로 앞에 큰 아파트를 만든다며 몇 달 내내 집들과 산을 폭파하던 때에는 주민들이 다들 집 무너지는 거 아니냐며 걱정할 정도였다. 그런데 폭발음과 함께 가끔 흔들리던 그 집은 그 이후 15년 동안, 고의로 철거하기 전까진,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 동네의 철거를 생각하면, 약하고 위험해 보였지만 오랜 시간동안 무너지지 않던 집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더 이상하게, 내가 살던 집이 철거된 것보다, 그 튼튼하고 정갈해보이던(맨 시멘트에 비닐로 문, 창문, 지붕을 덮은 집인데, 정갈해 보일 리가 없다- 분명 글씨 탓이다) 솜틀집이 철거된 게 가장 슬프다.

무슨 이유인지, 이 동네 이야기는 이렇게, 장황해진다.

여기부터가 본론인데, 그 동네에 살 때 내 가방에는 거의 항상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필름값은 물론이고 인화는 더더욱 비쌌을 시절이라, 필름이 들어있지 않은 카메라에 눈을 대고 카메라가 헛도는 소리를 들었던 적이 여러번이었다. 그래도 가끔 숙제나 여행 때문에 필름을 쓰게 될 때 몇 컷 정도가 여분으로 남으면, 인화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때 내가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하늘 사진이었다. 좋은 말로는 하늘, 나쁜 말로는, '허공'.

어느 날 우리 집에서 술을 드시던 아빠 친구가 내 심리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공허함 어쩌고 하면서. 사실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구름이 움직여 바뀌고, 하늘을 덮은 나무 그림자의 모양이, 농도가, 달라지는 게 신기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포스트를 쓴 건, 갑자기 이 일이 생각나면서, 해석으로 가득찬 세계에 살고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뭥미.